반응형
시사/문화 -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 궁궐을 짓다'전
고궁박물관 ‘조선 궁궐을 짓다’전
1803년 12월 13일, 한밤중의 화재로 창덕궁의 인정전이 전소됐다. 4일 후 인정전을 다시 짓기 위한 절차가 시작됐다. 기술자들을 소집한 것이 이듬해 1월이었고, 비슷한 시기 목재 조달 방법도 마련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으나 3월에 일시 중단된다.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목재 운반에 농민들이 대규모로 동원될 경우 농사를 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 것이다.
건물 하나를 짓는 데도 한 해 농사를 걱정해야 할 만큼 궁궐 공사에는 엄청난 공력이 들었다. 궁궐이 왕의 권위, 국가의 존엄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성하기 위한 백성들의 피땀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특별전 ‘영건-조선 궁궐을 짓다’는 궁궐의 조성에 들인 백성들의 노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전시회다. 공사 과정을 담은 기록, 장인들이 사용했던 도구들은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의 이면을 증언한다.
‘태평성시도’에서 전통시대 공사 현장을 묘사한 부분. 예나 지금이나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궁궐은 장인들의 피땀어린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건축물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궁궐 공사를 피해 도망간 석공들
궁궐이나 왕릉 조성같이 정부가 주도한 대규모 공사에 투입됐던 장인들은 군대나 공조에 소속된 경우가 많았다. 군대 소속의 장인은 평소 군인으로 근무하다 공사가 있으면 일꾼으로 동원됐다. 공조 소속 장인은 건국 초기에는 대부분 노비 신분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인의 비중이 늘기는 했으나 노비 신분의 장인은 여전히 많았다. 그래서 ‘면천’은 오랜 기간의 헌신하고 받을 수 있는 포상 중의 하나였다.
석공 김진성이 이런 사례다. 훈련도감에 소속된 천인이었던 그는 왕릉 조성에 여러 차례 참가한 공이 인정돼 1849년 면천을 허락받았다. 면천을 바란 장인들이 앞서도 있었으나 강고한 신분질서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석공으로 28년을 일하고 얻은 성과에 김진성의 감회는 깊었을 것이다.
장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된 노동을 짐작할 수 있는 궁궐 공사 기록물이 전하기도 한다. 흥선대원군 주도로 경복궁이 중건될 당시 작성한 ‘영건일감’의 1867년 기록은 도망친 석수들을 엄히 처벌하라는 지시가 있었음을 전한다.
“지방에서 잡아 올린 석수들은 도망치는 습속이 갈수록 심하다. 지금 남은 자를 보면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역을 정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겠기에… 결단코 마땅히 잡아 올려 특별히 엄히 처벌할 것이다.”
1794년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는 전라도에서 느티나무를 구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을 무리하게 동원한 현감이 좌천되는 일도 있었다.
◆장인의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연장
전시회에는 장인들이 사용했던 연장들이 출품됐다. 연장은 크게 끌, 톱, 대패, 망치, 송곳, 칼 종류로 나뉜다.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전시품은 아니지만 당대 장인들의 기술수준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 주목하면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경기대 김동욱 명예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화를 보이던 연장은 17세기에 오면 매우 세분화된다. 끌은 큰끌, 작은끌, 굽은끌 등이 등장하고 톱은 대·중·소톱 외에 걸거, 조입톱 등이 나온다. 용도에 따라 가장 세분화된 연장은 대패다. 김 교수는 “19세기에 이르면 대패는 대소엇미리, 건지개탕, 퇴미리, 골미리 등 용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화된다”며 “특히 창호 제작에서 이전보다 더 섬세하게 가공된 세부를 가꾸어 나갈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궁궐의 창호는 중심공간인 정전에는 화려한 ‘솟을빗꽃살창호’를 사용해 격을 높였고, 그 외 주요 전각에는 ‘띠살창호’, ‘정자살창호’ 등을 사용했다. 김 교수는 현재 볼 수 있는 것 중 눈여겨볼 창호로 창경궁의 명정전과 통명전, 창덕궁 낙선재의 것을 꼽았다. 명정전 창호는 굵고 육중하면서 섬세함이 두드러지고, 통명전의 것은 19세기 중반 침전 창호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낙선재 창호는 민간 살림집의 느낌이 드는 건물 외관에 맞추어 훨씬 정교하면서 세밀한 치장이 돋보인다.
박물관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창호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창호는 현재 대부분 소실되었거나 많은 부분이 변형돼 원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각종 의궤, 동궐도 같은 회화를 통해 참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세계일보
반응형
LIST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개국 - 이성계와 역성혁명 그리고 조선왕조의 시작 (0) | 2020.02.16 |
---|---|
삼국시대 꽃미남 단체, '화랑(花郞)' (0) | 2017.01.03 |
한국 근현대사 연표정리 (2) (0) | 2016.12.08 |
한국 근현대사 연표정리(1) (0) | 2016.12.08 |
한일합병 및 식민통치의 실상 (0) | 2016.10.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