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01. 유럽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빈 체제 이후의 비엔나>
프랑스 혁명으로 나타난 자유와 평등이념이 절대 왕정을 고수하던 유럽대륙을 휩쓸었다. 혁명의 물결이 자국 내로 침투되는 것이 두려웠던 유럽의 국가들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지만 나폴레옹에 패하여 결국 유럽에 혁명 이념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에 대 프랑스 전쟁을 이끌었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등 유럽의 열강은 프랑스 전쟁 이전의 절대왕정 체제로 돌아가기 위해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모여 '빈 체제'라는 왕정 복고적 성격을 가진 협력체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1820년부터 유럽에선 빈 체제 반대와 자유주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 내에는 여러 이민족이 살고 있어 통제가 쉽지 않은데다, 근대 산업의 발달도 늦어 통일 유지와 유럽의 자유주의를 억압하기에 힘이 부쳤다. 유럽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 여파로 결국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1848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19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여전히 근대적인 이미지를 갖추지 못한 도시였다. 1278년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가 이끄는 군대가 비엔나 북서쪽을 점령한 이후,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1521년 비엔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그 이후 위대한 제국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제국도시 비엔나의 보호막인 도시 성곽, 중심가에 우뚝 솟은 고딕식의 스테판 성당, 절대주의 군주 권력의 상징인 바로크식의 호프부르크 궁전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미지를 연출해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즉 견고한 성곽, 거룩한 성당, 그리고 화려한 궁전은 서로 잘 어우러져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제국도시의 품격을 과시하는 듯하였다. 그 중에서도 성곽은 제국도시가 견고한 황성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두 차례나 비엔나를 점령하면서, 제국의 수도 이미지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거기다 나폴레옹이 점령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부르크 궁전 바로 앞쪽 성벽을 폭파시키기까지 했다. 이 사건으로 비엔나 시민들은 현대전에서는 이 성곽이 더 이상 비엔나를 지켜줄 수 없으며 군사적 기능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비엔나 시민들 사이에서 낡은 성곽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소규모 도시 확장공사'라고 불리는 비엔나 성곽 개조 사입이 이루어졌다.
1816년에는 나폴레옹이 무너트린 성벽 부르크 바스타이에 대한 정지 작업이 시작되고, 1817년에는 모든 바스타이가 산책로로 개방됐으며, 1818에는 구 성문인 알트 부르크토어가 철거되었다. 이듬 해에는 정지 작업의 마무리와 함께 그 곳에 열린 광장이 들어섰다. 일명 '영웅 광장'이라고 명명된 이 곳은 궁정과 방문객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1823년에는 그 고아장 옆쪽에 자리 잡은 궁전공원과 인민정원이 마련되어 모든 비엔나 시민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었다.
소규모 비엔나 성곽 개조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다음으로 옛 성곽을 모두 허물고 비엔나 도심지와 글라시스 바깥 쪽에 있는 도시 외곽지역을 통합하자는 새로운 도시 확장 사업계획이 제기되었고, 활기를 띠었다.
<현대 빈 시가지>
*링슈트라세(Ringstrabe), 독일어로 환상도로, 순환도로 : 일정한 지역을 순환할 수 있게 닦아 놓은 도로
과거 성곽이 있던 자리엔 링슈트라세라는 순환도로가 생기고 주변은 주요 건물 및 관광지 건물이 생겨난다.
*도시외곽지역 통합 - 새로운 도시 확장사업
도시 외곽 지역이 앓고 있던 심각한 도시 문제가 도심지로 전위 될 우려가 커서 도시 확장 공사는 간단한 사업이 아니었다. 특히 절대 군주 체제가 적극 육성한 공장 산업이 발전하면서 비엔나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였고, 18세기 중반부터는 중남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될 정도였었다. 더욱이 갓 시작된 산업화로 인해 인구는 단 기간에 급증하였고, 값 비싼 생활비 때문에 비엔나 외곽 지역이 곧장 인구 조밀 지역으로 변해버렸다.
우후죽순처럼 공장과 작업장,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자 결국 주택보족, 교통문제, 식수 및 하수처리 문제, 가스와 위생문제, 병원과 학교 같은 사회시설 부족 등 그야말로 근대적인 사회문제들이 모두 발생했다. 조명시설이라고는 촛불이나 희미한 등잔불뿐이었고, 어두운 셋집들에는 난방시설이 빈약하거나 아에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수도 시설은 거의 없었다. 특히 비엔나 시민들 가운데 실내 화장실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은 1/4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가지 복합적인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수십만 명에게 기본적인 생활환경을 일시에 제공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에 선뜻 시행하지 못했다.
도시계획이 미뤄지는동안 19세기 초 유럽은 혁명의 물결이 넘쳐났고, 이에 오스트리아에서도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났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메테르니히 정권에 자신들의 혁명적 요구사항을 담은 3월 요구안을 제출했다. 주된 내용은 법률제정에 참여할 인민의 권리 보장, 국가 재정업무의 공개, 재판과정 공개, 배심원 제도의 도입, 검열의 폐지, 개인의 시민권 확립, 도시법의 제정, 종교의 자유, 시민적 자유와 평등 권리 보장 등이었다.
그러나 1848년 유럽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비엔나의 10월도 피의 학살로 혁명의 막이 내렸다. 그 해 겨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황제로 즉위했고, 1년 뒤 더 강력한 신절대주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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