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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시대 불교 전래과정과 석탑의 종류

by 자몽맛에이드 2016.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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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01. 한국

<삼국시대 불교 전래과정과 석탑의 종류>


1. 불교와 고대국가
 삼국시대 미술은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나누어 이야기할 때 그 의미와 성격이 명확해지며, 6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분미술(지하의 무덤)에서 불교미술(지상의 사찰)로 바뀌게 된다. 불교는 고대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에 가장 잘 부응하는 종교였다. 계속된 전쟁의 혼란은 삶과 죽음에 불친절한 유학보다 윤회가 있는 불교를 더 신봉하도록 만들었다.

 고대국가 성립의 3대요건은 율령체제, 영토, 종교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불교를 적극적으 받아들여 국가성립의 기틀을 다졌다. 불교를 스스럼없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유에는 크게 네가지로 추려볼 수있다.
- 존재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체계를 갖춘 차원 높은 고등종교
- 삶과 죽음을 윤회라는 간명한 논리로 설명
- 단순한 신앙형태로 누구든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대중성
- 부처,보살,천왕 등 종교 내의 위계질서를 현실의 계급 개념에 대입 가능

2. 삼국의 불교 전래과정
1)고구려 : 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가 불상과 불경을 가져옴(우리나라 최초 전래)
2)백제 : 침류왕 원년에 서역 승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 이듬 해 한산에 절을 짓고 10명 승려 상주(불교는 고구려와 백제에 큰 저항없이 수용되었지만, 두 나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다가 150여년이 지난 6세기 경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왕실의 지원과 함께 정치적 문화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3)신라(불교를 국교로 지정) :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불교가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민간에서만 서서히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이는 절대자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하는 불교를 토착세력이 배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중앙 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하기위해 불교의 공인이 필요했고, 마침내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공인에 성공한다. 이후 불교는 왕실의 주도아래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법흥왕 - 흥륜사, 진흥왕 - 황룡사, 선덕여왕 - 황룡사 9층 목탑) 신라의 불상은 다른 나라에 비해 현세적 이미지가 강한데, 이는 왕즉불사상과 호국불교를 당시의 사회에 대입시켜 표현하는 것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3. 탑과 가람배치
 탑은 사리를 모시는 공간으로서 '탑파'를 줄인 말이다. 가름은 사찰이라고도 하며, 예불을 올리고 불상과사리를 모시는 공간을 뜻한다. 처음에는 사리를 탑마다 넣었으나, 사리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사리 대용품으로 보석 또는 작은 불상이나 불경을 탑에 모시게 된다. 이때부터 탑은 절대자의 분신처가 아닌 사찰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후 예배는 자연스럽게 탑에서 불상을 모신 금당으로 옮겨가게 된다.
* 삼국시대 가람배치 : 탑 중심 - 주위화랑 - 부속건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기본: 남문-중문--금당-강당-승방-중문과 강당 사이를 회랑으로 연결)

4. 고구려의 사찰과 가람배치
 대체로 회탑식 13금당의 형식이며, 폐사지 평원군의 원오리 절터, 평양 청암리 금강사 터, 정릉사(복원, 변형된 회탑식)등이 있다. 특징은 목탑이 팔각 목조 건축으로 된 점, 절터의 평면 배치가 엄청한 기하학적 비례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 전래 당시 북조의 사찰(팔각, 십이각)을 계승하여 고구려 식으로 정착시켰고, 이는 후에 고려시대에 팔각다층석탑으로 다시 나타난다.

5. 백제의 사찰과 가람배치
 11금당의 형식이며 백제의 사찰은 한성백제 시기의 절터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고, 웅진백제 시기가 되어야 사찰의 존재가 확인된다. 대통사(공주), 정림사(오층석탑이 현존, 백제의 상징), 서복사 터, 군수리 절 터, 능사 터, 왕흥사 터 등이 있다. 웅진 사비 백제시기 사찰은 11금당의 형식을 보이고 있고 정림사 오층석탑을 제외하고는 모두 4각 목탑이다. 백제의 가름 배치는 일본에 그대로 전파되었고 오사카 시텐노지가 그 예이다.

6. 익삭 미륵사와 석탑의 발생
 익산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세운 절터로서 백제는 물론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이다. <삼국유사><서동요> 및 미륵사 창건설화를 바탕으로 10여 년에 걸쳐 미륵사를 발굴했다. 그런데, 미륵사에서 출토된 금사리봉안기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에 대한 언급만 있었다. (백제 왕후라 칭함) 또 이상한 것은 <삼국사기>에도 미륵사 창건 관련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를 무조건 허구로 돌리기도 힘들기 때문에 창건(선화공주)-발원(후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륵사는 복잡한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 평면은 11금당 식의 양 옆으로 날개 건물 형식이며, 양 탑을 본원의 목탑보다 작게 석탑을 조성하여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보여준다. 목조건축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석재로 지어진 미륵사 석탑은 석탑 그 자체로도 아름다워 우아한 곡선미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탑의 사원 양식이기도 하다.

7. 정림사 오층석탑
 백제의 석탑은 정림사 오층석탑에 이르러 비로소 석탑 양식의 틀을 갖추게 된다. 정림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움은 기단에서 5층까지 이르는 체감율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비례감각이 이 석탑에 고상함과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8. 왕궁리 오층석탑
 좁은 기단과 얇지만 모서리가 상큼하게 들려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는 왕궁리 오층석탑은 정림사 오층석탑을 충실히 계승한 백제풍의 석탑이다. 이 탑의 조성 시기와 관련해 의견이 분분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백제탑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9. 신라의 사찰
 신라는 법흥왕의 불교공인 이후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절이 모두 폐사지로 되고 지금은 그 절터조차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분황사만이 무너진 모전석탑과 함께 사찰의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10. 분황사 모전석탑
 선덕여왕12(634)에 창건된 것으로 중국의 전탑을 모방했으나 재료가 전돌이 아니기 때문에 모전석탑으로 불린다. 이 탑은 원래 7층 또는 9층이었을텐데, 3층까지 남아있으며, 돌 사자상과 금강역사상과 같은 조각들이 고풍스러움을 자랑한다. 이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라탑으로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경북 북부 지방의 모전석탑의 모형이 되었다.

 

11. 황룡사 건립 시말기
 총 면적 89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대찰이었던 황룡사는 호국사찰의 상징이자 신라의 국력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건조물이었으며, 창건 이후 오랜동안 신라불교의 중심 사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려 때 몽구의 침입으로 대부분이 불타버려 현재는 폐사되었다. 황룡사의 복원 문제를 두고 지금도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지만, 그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황룡사 탑에 담겨있던 민족사적 의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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